티스토리 뷰


가수 이상민은 래퍼이자 PD 출신 방영인입니다.

73년생 올해 46세로 고향은 서울이며 174cm 64kg로 알려져있습니다.

서울예대 영화과를 중퇴했습니다. 알려진 혈액형은 O형

 1990년대에는 당대 최고 관심 그룹 룰라의 리더이자 래퍼였으며, 1990년대 말부터는 제작자로 변신해 상마인드를 설립하고 샤크라, S, 컨츄리꼬꼬 등을 제작하여 성공시키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상급 PD로 이름을 날렸네요. 그러나 엑스라지와 QOQ가 대박에 실패하고 김지현의 2집, 백지영의 4집이 별 성공을 못 거두며 위기를 겪다가 비즈니스가로 변신했지만 2005년 11월 부도로 69억 8천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2012년 음악의 신으로 웅장하게 재기, 현재는 여러 공중파 프로그램의 MC이자 예능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싱어 이상민]


tvN의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선 자신의 인생사와 입장을 말했습니다. 특별히 어렸을 적 어려웠던 가정사를 얘기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어머니가 [아버지의] 본처가 아니었고 아버지를 직접 본 적도 없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 산소에 갔더니 자기 이름이 없었습니다고 합니다. 즉 이상민의 발언에 따르면, 자신은 혼외정사로 나온 사생아로서 생계가 무척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 참석 당시 신정환에겐 나이를 속였습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호적이 잘못되었습니다는 입장 표명[?]을 하였고 신정환에겐도 '정 네가 마음이 쓰이면 내가 호적을 바꾸겠다'고 했었습니다는 해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MC들은 형, 아우를 바꾸는 게 아니고 호적을 바꾸는 게 가능하냐고 비아냥댔고, 결국 그는 태어났을 때 가난한 형편으로 호적에 등록되지 못해 2년간 이름이 없이 '이애기'라고 불렸네요는 전설의 썰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상했던 슬픈 리액션과는 다르게, MC들과 룰라 멤버들 모두 폭소를 금치 못하고 이애기라는 별칭을 남용하는 데 이르자, '그거 되게 슬픈 거예요…'라며 기막혀 했습니다[…]. 자신에겐 홀로 몇 번 되뇌며 울 정도로 안쓰러운 사연이 분명합니다.


1994년에 룰라 1집 [백 일째 만남]으로 데뷔했지만, 투투의 아성에 밀려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요 프로그램에선은 10위권까지 들면서 선전하였고, 후속곡 [비밀은 없어]로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사실 룰라 데뷔 직전, 1994년 초에 김흥국의 레게[?] 음반인 [Last Reggae]의 타이틀 곡 [레게파티]에 랩 피처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인이라 트랙 리스트에 이름은 올리지 못했습니다고. 이 때문인지 김흥국과 형 아우 하며 지내는 등, 사이가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뷔 후 1995년, 2집 [날개잃은 천사]로 최고에 관심을 구가했습니다. 그 당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으로 대표되는 빠른 리듬의 음악이 대세다보니, [날개 잃은 천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속출했지만 이상민은 "이 곡으로 가야합니다. 이게 룰라의 색깔입니다" 라고 끝내 설득했습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전국의 음반 공장이 룰라의 앨범만을 찍어내야 해 다른 가수들이 활동을 미루게 됐을 정도의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울러 가요톱텐에선 혼성 그룹으로는 유일하게 한 해 두 번 골든컵을 수상하는 주인공이 되었고, 그 해에 서울가요대상과 sbs 가요대상을 수상할 정도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또한 매우 바쁜 일정 탓에 차 대신 헬기를 타고 스케줄을 다니는 등 최정상급 가수들만이 경험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3집 때는 타이틀곡 [천상유애] 표절로 인해 지탄을 받고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을 흔히 곱씹은 탓에 [천상유애]를 이상민의 곡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 곡의 작곡가는 미국 공연 당시 데모 테이프를 주었던 교포 제임스 리였으며, 홍재선이 편곡했습니다. 앨범에 표기된 작곡자명은 이 둘의 작곡가 그룹을 뜻하는 'season'입니다. 어쨌든 이 일로 크게 상심한 이상민이 동맥을 끊는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는 보도가 나기도 했습니다. 이때 문병을 온 탁재훈이 주머니에선 500원짜리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것밖에 없는 나도 사는데 니가 왜 죽어! 인마!!!" 라고 오열했습니다고 합니다.


2015년 6월 30일자 [호박씨]에선 이상민이 밝힌 바에 따르면, 자살 시도를 한 게 아니라 매우 화가 나고 분해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는데요, 피가 매우 많이 나서 매니저가 오해를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규탄으로 상흔을 받은 룰라는 이후 이현도의 프로듀싱을 받은 4집 [All System Go]로 성공적으로 복귀했습니다.


단 4집 수록 곡들 중 유일하게 이상민이 선보인 [아자]가 또다시 표절 판정을 받아 비판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이현도, 이현승 등 작곡가들과 동고동락하며 음악 작업실을 꾸리고 미디를 배웠습니다. 1997년에는 5집이 발매되었는데요, 이때 타이틀 곡이 “바보 바보 바보야~”로 시작되는 [연인]이라는 곡입니다. 이는 이상민의 첫 단독 작사, 작곡이었고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PD 이상민]


이후 룰라로서의 활동은 잠시 중단하고 이상민은 PD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는데요, 룰라 1집 멤버인 신정환과 당시 단독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탁재훈과 같이 결성한 컨츄리꼬꼬와 4인조 혼성 그룹인 샾의 음반 제작을 맡았습니다. 컨츄리꼬꼬와 샵은 이상민의 '상마인드'가 아닌 월드뮤직 소속이며 월드뮤직엔 타샤니와 이브도 있었습니다. 이브와 타샤니도 프로듀싱했습니다고 알려진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 이브는 멤버 G.고릴라가, 타샤니는 업타운의 정연준이 프로듀싱했습니다. 샵의 경우에는 그룹 결성을 이상민이 맡았기에 크게 관심을 받을 만 하지만 막상 이상민이 프로듀스한 1집 앨범은 잘 안됐으며, 이후 이상민이 손을 떼고 멤버 교체가 이루어진 뒤에 성공을 한 케이스.



다시 한번 짚자면, 이상민은 월드 뮤직의 사장이나 대표 이사가 아니었습니다. 97년 월드뮤직과 PD 계약을 맺고 소호대, 컨츄리 꼬꼬, 샵, 디바 1집을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샵 1집이 부진한 뒤, 월드뮤직에선은 이상민과 일을 하고 싶지 않아했으며[음악의 신 에피소드 참고.] 이후 룰라 재결합 음반을 만들면서 룰라 시절 스탭들을 모은 A&B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룰라 매니저를 대표로 앉혀놨다.] 재결합 음반을 성공리에 제작하여 월드뮤직과의 관계를 룰라 6집에선 끝낸 뒤, 이후 A&B 엔터에선 브로스와 샤크라 1~2집, 디바 4집 등을 제작한 다음 2001년 쯤 자신이 대표 이사직을 맡는 상마인드를 만든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 곳에선 월드뮤직이 이상민의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PD"라는 직업에 대해 잘 안 알려진 한국 음악 시장의 현실로 인한 착각입니다.


99년 룰라의 재결합 앨범을 제작하는데 자신이 거의 다 작곡한 6집 앨범이 30만장 이상에 판매고를 올리고 각종 방영 차트 1위를 달성하여 많은 수익을 벌어들였으며 이후 자신이 제작했던, 그리고 앞으로 제작할 소속 가수들을 모두 동원하여 YG패밀리를 모방한 브로스를 탄생시켜 가수만 14명, 총 100명에 가까운 인원을 한 무대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물가로 TV 참석 1회당 천만 원 중반 정도가 깨졌습니다고. 당시 흑 또는 백색 점퍼를 입고, 거친 랩을 쏟아내던 영상은 지금도 떠돌아다니는 레전드급 무대로 회자됩니다.




또한, 음반 제작뿐 아니라 자작곡을 쓰던 락 밴드 이브의 음악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을 작사, 작곡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전성기 때는 지금보다 더 정확한 정산이 안 되던 시절이었음에도, 저작권료만 한 달에 무려 1,500만 원을 벌었습니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의 1,500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99년 당시 우리나라 굴지의 초거대기업의 영상비즈니스단에선 그를 계약금 15억, 연봉 5억에 총괄 PD로 영입하고자 연락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액수이지만, 당시 물가를 고려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상민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는 얘기를 하였고 늘 주변 사람들을 통탄케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면, 지금의 SM, YG, JYP 3대 기획사만큼 충분히 소속사가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비즈니스가 이상민]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자신의 회사 '상마인드'를 만든 뒤, 99년에 이뤄낸 성공으로 지은 사옥이 SM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기도 하였고, 음반 제작자로사의 욕심이 많았던 이상민이 시설 투자를 상당히 많이 한 편이라서, SM 소속 가수들이 이상민의 기획사로 흔히 스튜디오 견학을 오기도 했었습니다. 청담동의 한 명품 브랜드 사옥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서, 지금의 많은 기획사처럼 음악 제작뿐만 아니라 의상 제작, 연습실까지 모두 한 건물 내에 구현해







버렸네요. 당시 JYP 사옥이 9억 하던 시절, 이상민에겐은 48억 규모의 현금이 있었습니다고 합니다[실질적으로 48억원의 현금이 있던것은 아니지만, 자신 소유의 물건을 현금으로 모두 바꾸고 할 경우에 48억 규모의 현금의 가치가 있었습니다는 것 입니다.]


인도 오리엔탈 컨셉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샤크라와 걸스 HIPHOP을 거의 처음으로 시도한 디바 1집, 웃기는 가수 듀오 컨츄리꼬꼬 등등, 다양한 음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도를 했었고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또한 좋지 않은 이별로 끝났지만, 스캔들 이후 지지부진한 활동을 하고 있던 백지영에겐 발라드 가수를 제안한 것도 이상민이었습니다. 


단 잘 나가는 소속사 사장이었습니다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데요, 막상 자신이 대표가 되는 상마인드 엔터를 차리고 나서 분출된 엑스라지는 역대급으로 망했으며 이후 클레오 4집과 이혜영 1집, 백지영 4집, 김지현 2집, QOQ 등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중에선 확실하게 성공을 거둔 앨범은 없었습니다. 클레오는 4집때 이상민이 PD를 맡은 것이라 자신이 제작한 팀이라고 보기에도 뭣한 수준. 브로스 활동 당시 참여한 바비킴도 이상민 휘하라는 말이 있는데 브로스 활동 때만 잠깐 데려온 것입니다. 타 기획사에선 PD로 있던 시절과 A&B 엔터에선 PD로 활동할때 초반 제작한 가수들은 성공했지만 자신이 대표 이사직이 되는 상마인드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뭘 좀 하려고 하니까 이때부터 일이 안풀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PD로서 여러 팀을 런칭시켰으며 자신이 제작한 룰라 재결합 앨범과 여러 가수들의 프로듀싱을 도맡아서 저작권료로 돈방석에 오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앨범 한장을 제작할 경우 받는 로열티가 1억 선이었습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상민은 룰라가 [날개 잃은 천사]로 힛트를 치기 시작한 199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상급의 PD이자 성공한 비즈니스가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무지막지한 돈을 벌어들이면서 재벌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며 행복한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무리한 비즈니스 확장 의지와 돈 관리 실패, 프로듀싱 실패, 그리고 자신이 언급한 당시의 '허세'로 이상민의 인생은 2000년대 중반부터 바닥을 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시 재기에 성공 ! 긍정의 아이콘 희망의 아이콘 이상민
늘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