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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롯데그룹의 개업주이랍니다.

그는 롯데의 명예회장으로 지내다가 2020년 1월 19일 병세가 위독해져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그 날 pm 4시 20분 경 노환으로 별세했어요. 향년 99세로 알려져있지요

일본명은 시게미츠 타케오로 <고향>은 울산이랍니다.

울산공립농업학교를 나온 후 와세다대학부설 실업학교 화공과를 나왔습니다.

울산광과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 신씨. 호는 상전[象殿], 일본 이름은 시게미츠 타케오 [重光武雄].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사업해 ‘대한해의논 사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요. 다만, 도호쿠 대지진 이후로는 주로 한국에 머무른다고 한답니다.

종교는 불교라고 한답니다.

1921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빈농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답니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대짜배기부친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어요. 1938년 졸업하면서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는데 주 업무는 양털깎기와 양돈 등이었고 박봉이었답니다.




1941년 부인 노순화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신영자를 비롯해 패밀리와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답니다. 동경에 도착해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포 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지요.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기회가 찾아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하나미츠[花光]라는 사람이 5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 주면서 공장을 해보라고 했어요. 이 돈으로 전쟁통에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분파되는 바람에 완벽히 쫄딱 망했어요. 다시 하나미츠에게 빌려서 다시 커팅오일 공장을 운영하는데 1년 반 뒤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어요.

1945년 광복이 되었고, 하나미츠도 살경과를 찾으라 위로를 하며 거액의 출실비를 포기한답니다. 진짜 자살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까지 몰렸으나,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땐 죽더라도 자신에게 거금을 빌려준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1946년엔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메인테인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답니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답니다. 솥다만 하나로 출발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 채까지  (선물)했어요.


이후 신격호는 약간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리고 메인테인류나 특수[고무]같은 물질들을 연구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시에 시판되고 있는 껌들을 죄다 사다가 한 번씩 다 씹어보고 각각의 껌들에 한두 가지씩 현존하는 장점들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어요. 그치만 신격호가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엄청 좋아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 이에 신격호는 출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껌을 팔기로 했는데,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창립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방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방식품위생법'은 오히려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돼 주었는데, 단속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상품력이 앞서서 공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답니다. 이에 따라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었답니다.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장악하고 있었답니다. 이에 신격호는 주력 시장이던 풍선껌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출대회[1953년]나 TV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올렸답니다. 이렇게 승부를 결정짓게 한 원인은 미국 리글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갖춤했기 때문이었답니다. 더 나아가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한 후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각각 손을 댔다. 더 나아가 롯데애드, 롯데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관련사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답니다.

괴테의 사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히로인 샤롯데를 본인의 이상형으로 보고 회사 이름까지 이렇게 지었다고 한답니다. 애초 로테[Lotte]는 독일어권에서 샤롯데[샤를로테]의 애칭[nickname]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실제로 괴테 사담에서도 이러한 애칭이 등장하기도 한답니다.




그리하지만 현대방식 츄잉껌을 처음 만들어 낸 Wringley사가 맨 처음 내놓은 츄잉껌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여성]을 타겟으로 한 Vassar,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편시장을 타켓으로 한 Lotta였답니다. 심지어 신격호가 츄잉껌 시장에 뛰어든 1948년 당시 츄잉껌의 주 소비계급인 젊은층,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대짜배기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한답니다. 창작물 캐릭터가 이상형이라서 회사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다는 것 보단 최초의 츄잉껌 이름 [+] 당시 대짜배기 인기를 얻고 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 = 롯데[Lotte]가 더 설득력이 있어보이네요. 실제로 롯데의 가지각종 건물, 브랜드, 모든 서비스 명칭엔 늘 샤롯데가 붙는데요. 가지각종 언론에서는 첩 서미경 씨를 신격호 회장의 샤롯데라 불렀다.

젊은 시절, 문학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어했어요고 전해진다네요. 그리하지만 현실은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여러 일을 하다가 주변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업사업을 꾸리게 된 것. 롯데의 이름을 짓게 된 원인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루머가 있었지만
일본국적을 취득한적이 없다고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